도마를 위한 변론

최평욱



영어에서 의심 많고 증거를 눈앞에 들이대야 믿는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다우팅 토머스(Doubting Thomas)’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토머스는 예수의 12사도 중 하나인’도마’를 가리킨다. 성인이 어쩌다가 의심꾼의 대명사가 됐을까? 신약의 ‘요한의 복음서’에 나오는 이야기 때문이다. 

도마는 다른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을 때 그 자리에 없었다. 나중에 그들의 목격담을 전해 듣고는 이렇게 말했다.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로마 병사가 창으로 찌른 상처)에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요한복음 20장 25절)

며칠 후 도마를 비롯한 제자들이 다시 어느 집에 모였을 때 문이 잠겨 있는데도 예수가 나타나 그들 가운데 섰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의 못 자국과 옆구리 상처에 손가락을 넣어보라고 도마에게 말했다. 그제서야 도마는 믿었고, 예수님은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하고 말씀하셨다. 

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화가들이 놓쳤을 리 없다. 많은 그림 중에 16세기 이탈리아 바로크 미술의 거장인 카라바조의 작품이 특히 인상적이다.


The Incredulity of Saint Thomas (Caravaggio)


도마는 갑자기 출현한 그리스도가 두려운 나머지 그와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는 상황. 하지만, 그래도 확인은 해봐야겠다는 고집스러운 의지로 눈을 부릅뜨고 이마에 주름을 잔뜩 잡은 채 손가락을 내밀고 있다. 예수는 자상하게 그의 손을 잡아 옆구리의 상처로 이끌고, 다른 제자들도 호기심을 감추지 못한 채 열중해서 들여다보고 있다. 사실적인 인물 묘사, 배경의 생략을 통한 집중, 명암대비 등 카라바조 특유의 미학이 빛나는 작품이다 

그런데, 과연 이 이야기가 도마의 불신을 비난하는 이야기일까? 실제로 기독교에서는 연약한 믿음을 표현하는 좋은 사례로 이 도마의 예를 들곤 한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 다른 해석을 내놓고자 한다.

성경의 다른 구절을 찾아보면 예수의 제자 중에 도마만큼 예수께 충실했고, 탐구심이 강했던 인물이 없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가 안 갈 때 다른 제자들은 대충 가만히 있어도(메시아의 말씀이니까!) 도마는 수도 없이 많은 질문을 하였고 끝없이 의심했다.

이제 성경을 덮고, 현실로 돌아와보자.

신앙에 있어서, 우리는 언제나 절대적인 믿음, 절대적인 복종을 이야기 한다.

우리들의 신앙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도마는 메시아의 말씀을 의심하고 복종하지 않은 죄 많은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신앙은 무엇인지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여느 2세 카프원자들, 성화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부모님에 의해서 태어날 때부터 교회의 환경 속에서 자랐다.

다시 말해, 내가 찾은 신앙이 아닌 누군가에 의해 ‘주어진 신앙’을 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것이 1세 부모님들과 우리 2세권 학생, 청년들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우리의 부모님들께서는 바로 눈앞에서 참부모님이 일으키시는 기적 같은 역사를 직접 체험하였고 또 절대적인 믿음으로 따라갔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그들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저 맹목적 믿음만으로 참부모를 따라갔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들은 원리에 대해서도, 참아버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끊임 없이 질문하고 더 깊은 탐구를 하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 끝에 나름의 답을 내렸을 것이며, 그 답은 참부모의 뜻과 완전히 혼연일체가 되어 역사를 만들어 냈고, 마침내 오늘날에 이르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뜻에 대한 맹목적 믿음, 절대적 순종의 이면에는 끊임없는 탐구와 의심이 선행 되었다는 것이다.

반면, 우리 2세권의 학생과 청년들은 위에서 말했듯, 우리의 부모님에 의해 ‘주어진’ 신앙을 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신앙은 자칫 탐구와 고민이 결여된 ‘겉치레 신앙’이 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자신이 직접 공부한 것이 아니라면, 자신이 직접 고민하고 의심하고 탐구해 본 것이 아니라면 결국 자기의 것이 될 수 없고, 그러한 신앙은 맹목적인 자세로 이어져 자신의 의견과 다른 사람,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을 배척하게 되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이것은 결단코 진정한 신앙이라 할 수 없다.

수없이 많은 유혹과, 또 수없이 많은 거짓과 선동이 난무하는 세상이다.

세상이 그렇게 흘러갈수록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는 너무나 힘들 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런 때일수록 올바른 길을 가기 위해서는 감정이 아닌 이성으로, 맹목적 믿음보다는 끊임없는 탐구와 고민으로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이 아닐까?



자신의 생명을 걸고 따랐던 스승의 부활조차 믿지 않고, 직접 경험해보고 의심하고 탐구해 보고자 했던 진정한 신앙인을 위한 변론을 이만 마치고자 한다.

블로그 이미지

아카이부

,